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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만원고료 농업인신문 공모 영농수기 최우수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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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고향나루 작성일09-12-18 20:36 조회11,99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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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만원고료 농업인신문 공모 영농수기 최우수작
글쓴이    최근학 등록일  2004-04-27 [18:01] 조회수  5,157
 
 관련링크 : http://www.chaesobat.co.kr

이름 : 운영자 (2003.3.30. 새 홈페이지로 옮김)
게시일 : 2001/01/26 (금) AM 11:06:51 (수정 2001/09/25 (화) PM 07:44:45) 조회 : 1137

저 높은곳 푸른 꿈을 향하여!

충남 서산시 대산읍 기은리 459-1 최 근 학

# 이 글은 농업인신문사에서 공모한 500만원 고료 영농수기에 응모하여
최우수작으로 선정된 원고지 110매 분량의 글입니다.


나는 1951년 9월 25일 충남 공주 [아래달밭]이라는 두메산골에서 6남1녀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초등학교 4학년을 끝으로 열세살의 어린나이에 남의집 머슴살이를 가야만 했다. 그것도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장리쌀로 빌려다 먹은 쌀 한가마니가 1년후 한가마반으로 늘어 그 빚을 갚기위해 1년을 살아줘야만 했던 것이다. 흐느끼시는 어머님과 정든집을 뒤로하고 눈물을 흘리며 남의집으로 떠나야 했던 그날은 생각만해도 눈물이 앞선다.
어린나이에 나의 집 머슴살이를 한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아픔과 눈물의 연속이었다.
1년후 정든집 부모님 품안에 다시 돌아 왔지만 학교에 다시 간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당시 우리집 형편은 아침 저녁 꽁보리밥 또는 밀기울 수제비와 쑥범벅등으로 끼니를 이었고 점심밥은 굶기가 일쑤였다. 겨울에는 고구마 삶은 것 몇 개와 동치미등으로 살았다. 그러나 그토록 어려운 환경속에 처해 있어도 배움을 그대로 끝낼 수는 없었다.
나는 열다섯살이 되던 해에 고된 하루하루의 이에 시달리면서도 밤이면 야간중학(재건학교)를 찾았다.
야간학교에 입학하던 65년봄 선배들이 이끄는 4-H회에 가입하여 처음으로 고구마 다수확과제를 이수, 그해 가을군내 1등이라는 영광을 안은 것이 7년여의 4-H활동을 하게된 동기가 되었으며 오늘날 농촌에 정착하게 된 밑거름이 되었다.
참외, 수박, 오이, 토마토, 가지등을 재배하여 리어카에 가득 싣고 어머니와 함께 몇십리길을 걸어 이곳저곳의 5일장을 누비면 가난을 몰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쏟았다.
그리고 봄, 가을이면 언제나 사방공사장을 찾아 일을 다녔다. 어떤 때는 10여Km나 되는 먼거리여서 새벽에 집을 나서면 캄캄한 밤중에나 돌아오곤했다.
이렇게 일을 한 대가로 밀가루를 받아다 아침, 저녁 끼니를 이어가던 보리고개 때에 밤사이 도둑이 들어 반포대남은 밀가루마져 가져갔을 때는 정말로 만사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며칠 뒤 그 도둑이 잡혔다는 연락을 받고 읍내 지서로 갔다오신 아버지 말씀이 바로 그 도둑은 아버지 친구였다는 말씀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농한기인 겨울에는 땔나무를 해서 내다 팔아 식량을 보탰다. 이렇게 고된 생활속에서도 야간학교엔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공부를 했고 2학년에는 학생장을 맡아 책무를 다했다.
4-H활동을 하면서 장관상으로 받은 크로바 메달(금5돈중)을 팔아서 동생의 중학교 입학금으로 사용했던 일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공장에 취직이나 하라고 하시던 부모님의 말씀을 뿌리치고 몇십리 떨어진 중학교에 몰래가서 입학시험을 치른 동생이 수석을 차지했으니 부모님의 마음인들 얼마나 아프셨겠는가! 나는 내가 못배웠으니 동생들만이라도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 그 고귀한 크로바 메달을 팔아서 입학금을 치뤄줬던 것이다.
68년 봄, 나는 2년과정인 야간학교를 졸업했다. 초등학교도 졸업못한 내가 중학교과정 2년을 배울 수 있었다는 것은 나 자신이 생각해도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이렇게 가시밭길 헤쳐나가는것 만큼이나 험난한 세월을 살아가던 68년 12월 어느날, 나는 결단을 내렸다.
4-H활동도 좋고 어려운 가정에 힘이 되어주는 것도 좋지만 공부를 더 해야만 한다는 결심에 부모님께서 외할아버지가 위독하시다는 통보를 받고 외가에 가신 틈을 이용하여 편지 한통만을 남겨둔 채 보름동안 땔나무를 해서 팔아 모은 돈 1천5백원을 가지고 서울행급행버스에 몸을 싣었다. 그야말로 [무작정 상경]이었다.
서울에 첫바을 내딛고 이리갈까 저리갈까 망설이다가 10원짜리 시내버스를 타고 내린 곳이 서울 영등포역이었다. 농촌생활에 검게 그을린 나의 모습이 사기꾼들의 속임수에 넘어가기엔 안성마춤 이었던지 검은 손길이 찾아왔다. 그들이 묻는 말에 고분고분 대답해주었더니 고향친구 만나게 되어 반갑다며 일자리가 있는데 보증금이 필요하다며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고 물었다. 1천2백20원이 전부라고 했더니 [곤란한데.... 그러면 첫봉급 타면 갚어] 라고 하면서 내가 건네준 돈을 봉투에 넣어 다시 주면서 공장에 가서 달라는 것이었다.
자기들은 영등포역에서 수출품을 싣고 갈테니 오류동 버스 종점에 가서 기다리라며 좌석버스비 15원을 안내양에게 건네 주었다. 취직을 한느가보다 싶은 반가움에 배고픈 줄도 모르고 오류동 종점에서 해가 지도록 기다렸지만 그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배가 고파서 포장마차에서 30원짜리 라면 한그릇을 사먹고 라면값을 내려고 보니 그들이 다시 건네준 봉투속에는 돈 크기만한 백지 몇장만 들어있을 뿐이었다.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오갈데 없는 나는 춥고 배가 고파 문전걸식을 해야만 했다.
그야말로 진짜 거지가 된 나는 꽁보리밥이라도 배불리 먹던 고향집과 부모, 형제 생각이 간절히 났다. 후회해 본들 돌아갈 차비한푼 조차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오류동에서 영등포역까지 걸어 며칠을 역전대합실에서 지새며 사기꾼들을 찾아 보았으나 허사였다. 죽고 싶은 심정뿐이었으므로 한강변에 와서 죽어 버릴까하고 눈물만 흘리다 돌아서기를 수없이 했다.
우여곡절 끝에 중부시장에서 쌀과 계란을 파는 상점에 취직을 하게 되었고 배달을 나갔다가 모 교육원 원장이라는 그집 주인의 제의에 따라 교육원으로 일자리를 옮겼다. 처음에는 그곳 식당에서 식기 닦는 일을 시작으로 사환을 거쳐 야간학교 다닐 당시 익힌 필경을 인정받아 1개월후부터는 필경사로 근무하게 되었다.
낮에는 직장에서 근무하고 밤에는 못다한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학원에 다니다보니 피곤한 몸을 이기지 못해 코피를 쏟는 일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2년간의 노력 끝에 70년 9월에는 중학교 졸업자격 검정시험에, 71년 8월에는 고졸자격 검정시험에 합격하는 영광을 안았다. 배움의 목적을 달성한 나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3년동안 편지 한통 전하지 못했던 불효자식이 고졸자격 합격증을 가지고 고향에 돌아가던 날은 부모님과 형제들은 물론 동네사람들까지도 나를 반겨주었다.
나는 그동안 배움으로 인해 중단했던 4-H활동과 가정을 돕는 일에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4-H 면연합회장과 지소 연합회장직을 맡아 꽃길 조성, 마을 안길청소, 기금조성, 퇴비증산등 많은 일들을 공동작업으로 추진해 나갔다.
그 결과 72년에는 충남도내 모범 4-H회로 선정되었고 7년여의 4-H활동을 하면서 각종 과제이수로 받은 상장과 표창장이 23개나 된다.
새마을운동 사업이 한창일 때 나는 국가의 부름을 받고 73년 12월 군에 입대했다. 혀이 입대한지 1년 뒤었고 내가 입대한 수개월 뒤 동생도 입대하게 되었으니 3형제가 군복을 입게 된 것이다.
1년여 만에 휴가를 얻어서 고향집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가정은 파산된 후 였다. 부모님은 빚에 쪼들리다 못해 어디론가 고향을 떠나셨고 중학교에 다니는 동생은 담임선생님 댁에 있었고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동생은 형수께서 친정으로 데리고 가서 살고 있었다.
그리고 막내동생은 초등학교 3학년을 다니다 만 채 외가에서 살고 있었으며 중학교를 졸업한 여동생은 [작은오빠 저는 오빠가 휴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다가 정처없이 떠납니다.] 라는 편지 한통만 남긴채 고향을 떠났다.
만나는 동생들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고 흐느낄 때 더구나 [엄마한테 데려고 달라]며 군복바지르 움켜쥐고 울부짖는 열한살짜리 막내동생은 군복을 입고 있는 나로서는 이럴수도 저럴수도 없는 상황에서 원망스런 눈물만 앞을 가렸다.
이렇게 가정이 파탄에 빠져있는 것을 본 나는 찢어질 듯한 아픈 마음을 억누르고 남은 휴가일정을 포기한 채 부대로 복귀하여 장기복무를 지원했다. 동생들의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해주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빈손으로 전역해봐야 돌아갈 집조차 없는 처지였으므로 전역 후 농촌으로 돌아가서 못이룬 나의 푸른 꿈을 펼쳐 나갈 자금 목표액 1천만원을 마련하기 위해 동생들을 도와가며 열심히 저축을 해 나갔다.
군에서도 시간이 허락하는대로 유휴지를 활용하여 고추, 상추, 배추등을 재배해 장병들의 입맛을 돋구어 주는데 힘을 기울였고 시간만 있으면 영농서적을 구입해 읽으면서 전역후의 미래를 설계해 나갔다.
상관들의 총애를 받으며 보람있는 군생활이 계속되는 동안 장기복무를 지원할 때 세운 나의 목표액 1천만원을 손에 쥐게 되었다. 남들은 인사과 선임하사관이란 좋은 직책을 버리고 왜 농촌에서 땅을 파려고 하느냐면서 전역을 만류했지만 81년 11월 30일부로 8년간의 군생활을 청산하고 전역을 했다.
군생활을 하는 동안 부모님이 살고 계신 곳도 찾게 되었고 나도 결혼을 하여 지금은 대학교 3학년과 1학년에 다니는 남매를 두고 있다.
동생들돌 모두 제자리를 찾게되어 남부럽지 않은 가정으로 변모하였지만 6년전 7급 공무원으로 있던 다섯째 동생이 출근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등지게 된 것이 부모님을 비롯한 온 식구들의 슬픔으로 마음 한구석을 자리잡고 있다.
내가 전역을 하여 정착하게 된 곳은 고향과는 좀 떨어진 충남 서산땅 해변가이다. 이곳을 제2의 고향으로 믿고 6천여평의 땅을 사들여 단칸방 블록집을 짓고 이사를 했다.
8년이란 세월동안 일손을 놓았다가 다시 농사일을 하려니 손바닥이 부르트고 코피를 쏟을 때도 한두번이 아니었으나 달이 밝으면 밤이라도 어김없이 밭에 나가서 일을 했다. 남들이 [올빼미]라는 농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상업농시대라는 시대적 요청에 따라서 그날그날 한 일은 영농일지에 꼬박꼬박 기록을 하여 다음해의 영농설계를 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이용하였으며 1년동안의 농사에 대한 손익을 파악하여 수지타산이 맞는 작목선정과 새상품을 개발하는데에 활용하였다.
특히 82년부터 밤고구마 조기재배를 시도하여 매년 높은 소득을 올렸으며 남부지방보다 보름정도 늦게 출하되기 때문에 발생하는 가격차이를 줄이기 위해 수년동안 연구한 끝에 88년에는 남부지방 보다 오히려 빨리 시장에 내놓을 수 있는 터널조기재배법을 개발하게 되었다.
밭농사를 주작목을 하다보니 퇴비를 이용하여 유기농업을 하는 것이 지력증진은 물론 저공해 농산물을 얻을 수 있다는 판단아래 축산농가라면 모두 잊혀지지 않는 83년에 일부 땅을 처분하여 한우 15마리를 사들였다.
풀 한줌이라도 더 베어다 주며 사양관리에 노력을 했지만 소값은 계속 폭락하기만 했다. 나는 기왕에 축산을 하려면 낙농의 길을 택하는 것이 유리할 것 같아 한우를 모두 처분하고 젖소 초임 만삭우 5마리를 구입했다. 초지 한평없이 시작한 초창기에는 10여km 떨어진 곳까지 다니며 경운기로 풀을 베어다 먹이며 온갖 정성을 다해 관리를 했다.
이듬해부터는 일부 밭을 제외하고 모두 사료포로 이용하니 풀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고 매달 2회씩 원유값이 나오니 일정금액씩 저축도 할 수가 있었다.
86년에는 농민후계자로 선정되었다. 그동안 젖소에서 나오는 우유와 송아지를 팔아 모은 돈과 농민 후계자금 8백만원으로 농지를 구입하기로 하고 여러군데 물색을 보았으나 서해안개발 지역으로 대규모 임해공단이 들어서게 되어 땅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그러던 어느날 이웃 아저씨께서 [자네가 땅을 구입하겠다면 내땅을 적당한 금액에 팔겠네]하시기에 현지 시가보다 월등히 싼 금액인 평당 1만원씩 2천평을 매입하게 되었다.
이제는 가정생활도 안정되어 남부럽지 않은 살림을 꾸려 나갈 수 있었으나 단칸방 신세를 면하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래서 새로 구입한 땅위에 새집을 짓기로 하고 부푼 마음에 몇날을 밤잠까지 설펴가며 설계도를 만들어 새집을 짓고 88년 8월에 새집으로 입주하였다.
비록 30평짜리 블록벽에 슬레이트 지붕을 올린 집이지만 보일러 시설에 목욕탕, 응접실, 입식주방등 현대식으로 구조물을 갖추었으나 어는 누구의 집도 부럽지 않았다. 젖소는 계속해서 값이 높은 암송아지만 낳아 주었고 사양관리와 질병예방등에 정성을 다하니 건강하게 자라주었다.
모든 청예작물은 비닐백 사일로를 만들어 급여하는 방법으로 사육하다 보니 높은 등급의 유지방을 얻을 수 있었고 사료값도 절감하는 동시에 많은 양의 우유를 생산할 수 있었다. 한참 부품 꿈속에 소들과 함께 보내던 88년 어느날 가을이었다. 또 한번의 절망과 실의에 빠져들게 되었다.
목초종자를 인수하러 시내에 있는 축협에 나갔다가 자그만 골목길 사거리에서 과속으로 앞을 가로지르는 오토바이와 충돌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상대방 1인용 오토바이 뒤에 발을 벌리고 타고 가던 사람이 내 오토바이 앞바퀴를 치고 나가면서 크게 다쳤다.
결국 그토록 아끼고 보배처럼 여겨왔던 젖소 착유유와 육성우를 모두 처분하여 1천3백여만원을 치료비와 합의금으로 지불해야 했다. 합의를 못보면 구속된다는 말에 급히 처분하다 보니 제값도 못받고 팔았다. 나는 잠시 실의에 빠졌으나 이보다 더 큰 고난들도 무난히 이겨나왔다는 자부심으로 축사를 돈사로 고쳐 적은 자금으로도 시작할 수 있는 양돈을 해보기로 하고 농협으로부터 대출을 받아 9마리의 어미돼지를 구입했다.
한때는 돼지값 폭락으로 실망도 했었으나 9마리의 어미돼지가 낳은 새끼 1백여 마리가 무럭무럭 자라서 출하시기가 된 설날을 앞두고 돼지값도 회복이 되니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지난날의 실패와 좌절의 고통을 교훈삼아 미래의 대농장주로서의 푸른 꿈을 키워나가던 때 농심을 뿌리채 흔들며 농민들의 가슴에 암울한 먹구름을 안겨준 우루과이라운드의 거센파고가 세차게 몰아치던 91년 2월 나는 농협중앙회에서 농민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기위헤 실시하는 새농민상을 받게 되었다.
그후 나의 주변에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우리집 한아름 농장의 주작목이었던 양돈과 수박, 밤고구마 농사가 첨단농업으로 각광받고 있는 시설채소 양액재배 농사로 탈바꿈 되었고 그후 나에게는 두 번의 농어민 후계자 회장과 농촌지도자회장, 새마을지도자, 농협 대의원, 새농민회 분회장등 굵직굵직한 직책들이 주어졌다. 맡은 임무를 충실히 해오다 보니 충청남도 농어촌 발전대상 본산부문 대상의 영광도 안게 되고 세계농업시술상 첨단농업부문상도 받게 되었다.
내가 이처럼 성장해온 것은 지난날의 고통을 이겨내고 흙과 함께 나의 젊음을 다 바쳐온 결과라고 믿는다. 새농민상수상자 일본 선진 농업국 연수를 다녀온 후 이뤄진 일들이어서 더욱 값진것이었다.
그당시 우리 농민들은 어느날 갑자기 예고없이 아닌 밤중에 홍두께식으로 몰아닥친 UR 파고에 휩싸여 농정부재를 성토하고 있을 때 내가 본 일본 농민들은 농산물 수입개방은 기장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오직 새로운 신기술 소득작물 개발과 첨단농업으로 소비자들의 기호에 맞는 고품질 청정 농산물을 생산하는 것 만이 댕응책이라는 그곳 농민들의 말을 듣고 나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나는 국경없는 무한경쟁시대를 맞아 우리 농업도 오직 첨단 기술농업과 고품질 농업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만이 이 땅에서 살아 남을 수 있는 유일한 생존의 길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일본 연수를 다녀온 나는 몇날 몇밤을 지새우며 미래의 푸른 꿈을 설계한 끝에 양돈과 수박, 밤고구마 농사를 마무리하고 개방화시대에 걸맞는 신기술 고품질 농업으로 승부를 걸어보기로 결심하였다.
일본 후쿠시마현 선진농가 연수때 내가 가장 관심있게 보았던 것은 첨단시설의 수경재배 현장이었다. 그래서 나도 기왕이면 첨단기술 농업으로 승부를 걸어보는 것이 가장 유리할 것이라는 판단으로 수경배배 농사를 해보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그러나 국내의 대표적인 농가 몇군데와 원예연구소 수경재배 시설들을 돌아보니 일본이나 국내수경재배 시설들 모두가 하나같이 엄청난 시설비가 투입된 첨단시설들 뿐이라는 사실에 자금 사정이 여의치 못한 나로서는 엄두도 못냈고, 여기서 나는 수경재배는 꼭 유리온실이나 PC 온실등 첨단 시설에서만 가능한 것인가라는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특히 우리 고장에서 생산 출하되고 있는 오이작목은 토양재배보다 품질과 상품성명에서 월등히 떨어진다는 말을 많이 들어왔기 때문에 의구심은 더욱 증폭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저렴한 시설비를 들여 농민들 누구나 쉽게 수경재배를 할 수 있는 방법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것이 바로 내가 연구해 나가야할 과제였다.
나는 국내 몇몇군데의 수경재배 시설들을 농촌지도소 담당지도사와 함께 더돌아보았고 원예연구소 수경재배 관련 연구관들로부터의 여러 가지 자문도 들어 보았다. 수경재배 관련 서적들을 구입하여 몇번씩 되풀이해 읽어보면서 여러방면으로 구상을 해보았다.
나느 결국 [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집앞의 비탈진 계단밭을 정지작업하여 6백평 규모의 3연동 1-2w형 파이프온실을 짓고 국내에서 생산되고 있는 펄라이트를 이용한 절약형 점적식 배지경양액재배를 시도해 보기로 하고 세밀한 계획을 세워 농협에서 근저당 설정을 하여 대출을 받고 그동안 푼푼히 모아 온 적금해지 등을 포함하여 5천여만원의 재원을 확보하였다.
그당시 우리 고장에서는 하우스 농사를 짓고있는 사람은 전무했으므로 지원은 한푼도 받들 수 없었고 작목반원 모두가 1백% 자부담금만으로 온실 시공에 참여하였다.
온실 시공업체에서 제시하는 인건비를 절약하기 위하여 자재만을 단체로 구입하여 안식구와 함께 농한기인 11월달부터 4개월동안의 기긴 겨울동안 눈보라가 몰아치는 엄동설한의 날씨에도 모닥불을 피워놓고 손발을 녹이면서 온실공사를 진행하였다.
온실 시공에 함께 참여하고 있는 동료 작목반원들의 도움을 받아 비닐 씌우기 작업까지 끝내고 나니 정말로 거대한 공장이 들어선 것같이 웅장하고 은빛 찬란한 비닐하우스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러나 비닐 씌우기 작업을 마친 바로 그날밤 나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날벼락이 떨어졌다. 결손끈을 허술하게 씌워서였던지 낮도 아닌 한밤중에 눈보라와 함께 몰아치는 돌풍으로 비닐을 날려버렸다. 하늘로 치솟으며 세찬 바람에 날리는 비닐소리는 전쟁터를 방불케 하였다. 그야말로 밤새 따발총 쏘는 소리보다 더 했고 온 동네사람들이 놀라서 전화가 빗발쳤다.
온 식구가 발을 동동 구르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지만 다음날 날이 새면서 바라보이는 하우스 주변에는 0.12mm짜리 그 두꺼운 비닐이 산산조각이 나서 눈이 쌓인것처럼 하얗게 깔려 있었고, 철재들도 군데군데 휘어져 엉망으로 된 채 나의 마음을 서글프게 했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절망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실망은 되었지만 비온 뒤 땅은 더욱 다져진다는 말이 있듯이 작목반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구부러진 철재들을 다시 손보고 비닐씌우기 작업을 마칠 수 있었다.
이제는 앞으로 더 큰 바람이 불어도 견디어 낼 수 있도록 철고리를 구입하여 파이프에 드릴로 구멍을 뚫고 고정을 시킨 뒤 고정끈을 견고하게 띄웠다. 내부시설은 관리기로 골을 만들고 보온덮개를 깔아 베드를 만든 후 물이 새지 않도록 비닐을 깔고 물빠짐이 용이하도록 60mm PE관을 2분지1로 쪼개어 엎어 넣고 그위에 필라이트를 채운 뒤 점적테이프를 2열로 배열하고 흑백 필름으로 멀칭을 하는 순서로 배드설치 작업을 모두 끝냈다.
배지자료로 사용한 펄라이트는 현재는 양액재배 전용배지재료로 생산, 판매되고 있지만 92년 당시는 전용배지가 없어서 공업용 보온단열재로 판매되고 있는 제품을 사용했다.
이제 모든 시설이 끝나고 작목정식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집 한아름 농장에는 첨단 유리온실대신 중앙집중 제어방식 자동화 시설이 갖추어진 6백평짜리 파이프 비닐온실과 값비싼 콘크리트 구조의 수경재배시설, 또는 외국산 락울베드 시설대신 보온덮개 베드와 펄라이트를 이용한 값싼 점적관수식 절약형 배지경 양액재배 시설이 4개월여만에 모두 완성되었다.
나는 국내 최초로 시도하고 있는 절약형 재배에서 성공을 거두어 첨단기술농업으로 무한 경쟁시대에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 마음은 농민들 누구나 한결 같아도 엄청난 시설비 때문에 선 듯 달려들지 못하고 있는 모든 농민들이 큰 부담이 되지않고 저렴한 시설비로 일반 기존 비닐하우스에서도 누구나 간단한 시설로 그동안 큰 피해를 주고있는 염류축적으로 인한 연작장해를 극복하고 연중재배와 장기재배가 가능하며 소비자들의 구미에 맞는 안전하고 신선한 고품질 농산물 생산과 쾌적한 작업환경속에서 단위 생산성을 높혀 높은 농가 소득을 올릴수 있는 그날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첫작목으로 선택한 오이묘를 정성을 다하여 베드에 옮겨 심었다.
시설공사의 지연으로 계획보다 10여일 늦은 92년 3월중순 미리 육묘장에서 길러온 건실한 묘를 조금만 시험재배 해보고 면적을 늘려나가라고 하는 몇몇분들의 충고에도 아랑곳 하지않고 6백평 전포장에 모두 정식을 마쳤다. 그러나 웬일인지 10여일이 지나도 오이묘는 활착 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잎이 노랗게 변하고 있어 나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날이 갈수록 실패작이 되는가 보구나 하는 생각으로 애를 태웠으나 나는 틀림없이 무엇인가 잘못된 원인이 있을 것이라는 판단으로 차근차근 그 원인을 찾아보기로 했다.
결국 문제는 양액공급에서 잘못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EC측정기를 구입하여 양액의 농도를 체크해 보았더니 맹물에 가까운 0.2미리몰의 성분량을 공급해 주고 있었다는 것이 그 원인이었다.
나는 곧바로 10배의 농도로 배양액을 공급했더니 3일뒤부터는 오이잎이 진녹색을 띄며 활착이 되기 시작했다. 그후 우리 부부의 오이 유인기를 설치하여 하늘을 향해 힘차게 뻗고 있는 오이 넝쿨을 유인하여 마디마다 주렁주렁 여리는 오이를 수확하며 기쁨을 만끽했다.
결과는 첫 시험재배 작형에서 국내 처음으로 배재경 대면적 양액재배 실용화에 성공을 하게 된 것이다. 밤고구마 턴널 조기재배법 개발에 이은 두 번째의 개가였다.
나는 한없이 기뻤으면 흙과 함께 살아온 나의 반평생에 가장 보람있는 일로 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알찬 성과라고 자신있게 말하고 싶다. 5월초부터 첫수확을 하게 되었는데 품질과 상품성도 듣던 이야기보다 월등히 좋았고 관리에 따라서도 고꽈도 적게 나오고 재래종 오이 맛의 그래로 였다.
생산된 오이는 15kg들이 골판지 상자에 엄격히 3등급으로 선별하여 오이의 생명인 가시가 떨어지지 않도록 방습지 1장을 깔고 오이1줄, 또다시 방습지를 깔고 오이를 넣는 방법으로 포장하여 출하했다.
일반오이와 구분을 하기 위하여 얼굴사진이 들어있는 스티카 상표를 제작하여 상자에 부착했다. 이렇게 선별, 포장을 철저히 함으로써 국립농산물 검사소로부터 품질인증까지 받아 출하를 하게되니 연일 최고시세로 경락되었다.
농촌진흥청에서 발해하는 [농업기술]지와 각 신문지상을 통해 양액재배에 관한 내용들이 보도되자 전국 각지에서 관심을 갖고 있는 농민들의 농장견학이 줄을 이었다.
관심이 많은 농민들은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찾던 농법이라며 무릎을 치며 환호했고 비디오 촬영기까지 동원하여 구석구석 시설구조를 테잎에 담아가기도 했다.
농장견학이 계속 이어짐으로 해서 견학 농민들에게 하루에도 몇차례씩 농장소개를 하다보면 시간을 많이 빼앗겨 일손이 모자라 애를 태울때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더구나 단체 견학팀이 방문했을 때는 개폐장치 및 양액공급장치계기등을 손을 대어 발생하는 피해도 여러차례 껶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우리 농장을 연일 찾아 주는 견학농민들을 볼 때 결코 우리 농촌과 농업의 미래가 어둡지만은 않다는 것을 엿볼 수 있었으며 그들에게서 풍기는 순박한 농심이야말로 나에게 뿌듯한 보람을 안겨주었다.
최근에 와서는 우리집 한아름 농장의 시설과 똑같은 방법으로 양액재배를 하고 있는 농가가 날로 증가하면서 어느때는 하루에도 몇차례식 양액재배에 관한 문의전화가 걸려오고 있다.
첫해 봄, 가을 두작형을 합쳐서 4천8백만원의 조수익을 올려 양액비료값과 농약비, 광열비등의 6백만원을 제외하고도 4천2백여만원의 순소득을 올렸다.
1년 농사로 총 시설비 5천만원중 84%의 소득을 올렸다는 것은 나 자신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1년간 촉성 및 억제작형의 오이 절약형 비재경 양액재배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몇가지 문제접으로 떠오른 시설들을 보안 또는 교체하여 완벽한 시설을 갖추었다.
얼여덟 이랑의 보온덮개로 만든 베드시설을 지중난반을 할 수 있는 스틸로폼베드로 주문제작하여 아홉이랑으로 절반으로 줄여서 밀식을 해 양쪽으로 지그재그 유인재배를 할 수 있게 했고 베드바닥에는 에스렐 파이프로 지중난방 시설을 하여 지난해 낮은 지온 때문에 있었던 무제점을 말끔히 해결하였다.
나는 지중난방 시스템도 1개의 보일러와 순환모타, 온도감지기로 6백평의 전면적이 구석구석 일정하게 온도유지가 될 수 있도록 작목반 동료와 공동으로 자체개발하여 자가설치하였다.
완벽한 절약형 지중난방 시스템이었다. 지중난방 시스템은 우리식 양액공급 시스템 개발에 이은 또 하나의 자체 기술 개발품으로 이 시스템은 전국지역으로 확산되어 가고 있다.
나는 지중난방 시설까지 설치하게 됨으로써 이제 한겨울철에도 마음놓고 작물을 재배할 수 있도록 했고 베드를 절반으로 축소시킴으로서 배재값도 함께 절반으로 절감시켰고 밀식으로 V자형 양방향 유인재배를 함으로써 인건비등 생산비를 더욱 절감할 수 있는 절약형 배지경 양액재배 기술을 개발, 탄생시켰다.
내가 양액재배에 성공함으로써 함께 파이프온실을 시공했던 동료반원들도 모두 배지경 양액재배 시설을 하여 이제는 작목반원 전원이 양액재배로 전환하게 되었다.
나는 수년째 양액재배를 해오면서 일부 구간을 시험포로 이용하고 있는데 훈탄전용구, 훈탄+펄라이트 사용구, 왕겨전용구, 석분전용구등 여러종류의 배지를 이용하여 시험해본 결과 펄라이트 전용구에서 가장 우수한 결과가 나왔다.
그리고 95년에는 양액재배 하우스에서 사용후 흘러나오는 페양액을 버림식에서 보정에 의한 재순환식으로 전환하고 일부 폐양액은 노지작물에 관주하여 재활용함으로써 양액비료염과 노지작물에 사용할 퇴수양액을 방류함으로 인한 환경오염을 극소화시킬 수 있는 1석2조의 효과를 억기 위하여 시 농업기술센터와 함께 현장 애로기술 사업으로 퇴수양액 재활용 기술개발 사업을 추진하여 성공적인 결과를 얻었다.
노지작물에 폐양액을 관주하여 시험한 작물중 생각재배에서 가장 큰 효과가 있었다. 배추, 고추, 생강 3가지 작물을 관행구, 폐양액전용구, 기비+폐양액사용구 등 3가지로 구분하여 시험을 하였고 생강과 고추는 비가림재배에 폐양액을 공급하여주는 시험재배도 병행하여 실시 했다. 그중 생강재배는 관행구와 폐양액사용구와의 격차가 놀랄만한 시험결과가 나왔다.
관행구에서는 부패병(일명 노랑병)이 많이 발생되었으나, 폐양액사용구는 전혀 발생하지 않았고 생강의 크기차이는 물론 폐양액사용구에서는 생강이 벌집 처럼 2층, 3층으로 열린다는 사실도 알았다.
평가회장에 참여한 백여명의 농민들 이야기가 생강알이 굵다보니 중국생강 아니냐는 말도 많이 들었다. 그 만큼 폐양액을 활용해 재배한 생강이 잘되었다는 말로 표현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한가지 한가지 신기술개발을 해나가고 있는 나는 또 하나의 자랑할만한 일이 있다.
나에게 있어서는 소중한 기술개발 작품이다. 배지경 양액재배에 있어서 아직도 문제가 있다면 초기 시설투자비가 많이 드는 것으로 그중에서도 배지재료로서 이문제만 해결된다면 우리 농업의 획기적인 발전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동료 작목반원과 함께 개발하게 된 것이 무배지 점적식 양액재배와 절약형 미니 베드 배지경 양액재배 기술이다.
1년동안 시험재배를 거쳐 95년 시설채소생산, 유통지원사업으로 시공한 8천여평의 온실에 두가지 재배기술을 활용해 오이, 방울토마토, 고추를 재배한 결과 방울토마토는 두가지방법 모두 성공작이며 오이와 고추작목은 미니베드 배지경재배에서 완전 성공작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두가지 기술 모두 베드 안쪽 넓이가 25cm, 높이 6cm, 길이 1m인데 무배지는 상판을 덮어 상판위에 지름 3.5cm의 구멍을 뚫어 묘를 넣을 수 있도록 제작하였다.
이렇게 양액재배에 관련된 신기술 개발에 심혈을 기울여 오는동안 나의 생활주변에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 관내 각종행사때와 전국 각처의 작목반 또는 교육기관들의 초청강의등이 이어졌고 공주산업개발 대학원 최고농업경영자과정과 지도자과정을 수료하면서 실경험을 바탕으로 기술한 수료논문집은 뜻깊은 일이 아닐수 없다.
더구나 93년도 농어민후계자 회장 재직당시 제1회 충남도 농어촌발전대상 단체상을 수상했던일과 94년 제2회 충남도 농어촌 발전대상 본상부문의 대상 수상자로 선정되어 1천만원의 상금과 함께 수상했던일도 뜻깊은 일중의 하나다. 96년에는 세계농업기술상 첨단농업부문상을 수상하고 유럽5개국 선진농업 연수를 다녀오기도 했다.
나는 이런 영광들이 더 열심히 하라는 채찍으로 받아들여 우리 농촌사에 길이 남을 선진농업국으로 발돋움해 나가는데 이한몸 바치겠다는 각오를 해보았다.
이제는 농업도 무한경쟁시대를 맞아 협업생산체계가 아니고서는 살아남기 어렵다는 차원에서 나는 93년 작목반동료들을 규합하여 영농조합법인을 설립하였다.
UR이라는 거대한 태풍속에서 태동한 WTO체제의 출범과 함께 밀려오는 값싼 수입농산물과 맞서서 싸워 나간다는 것은 소규모 영농으로는 힘겨운일이 아닐 수 없으며 결국 이대로라면 우리농업은 무너질 수 밖에 없다는 아타까운 생각에서였다.
국경도 없다는 무한경쟁 시대를 슬기롭게 대처해 나갈 수 있는 길은 오직 대규모 집단화된 기업농 체제로 탈바꿈해야만 우리 농업이 살아 나갈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또한 우리농업도 국민소득 항상에 따라서 양에서 질위주의 농어생산으로 바뀌어가고 있는 추세에 있고 소비자들의 기호에 맞춰 고품질에 안전성까지 포함된 농산물을 생산해 나감으로서 소비자들에게 우리농산물을 생산해 나감으로서 소비자들에게 우리농산물에 대한 신뢰성을 심어 줘야만 개방화 시대를 헤쳐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동료들과 함께 사업계회서를 만들어 전업을 하기위한 사업확장을 위해 농협과 농업기술센타, 시청등 관계기관을 찾아 다니며 신규사업 유치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던중 94년말 시청으로부터 95 시설채소 생산, 유통지원사업으로 확정되었다는 통보를 접하게 되었다. 대산 영농조합법인 대표를 맡고 있는 나로서는 더욱 바쁜 나날들이 시작되었다.
사업이 확정된후 회의를 소집해 만일에 발생될 문제들을 대비하여 여덟명의 전 조합원을 대상으로 가서까지 받아놓았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중도에 탈퇴 또는 사업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히을 모아 사업에 참여한다는 내용이었다.
95년 새해 맞으면서 법인 동료회원들과 함께 그토록 바라던 대규모 집단화된 농장을 운영하는 기업농으로 새출발을 한다는 부푼 마음으로 시설채소생산, 유통지원 사업은 시작되었다.
총사업비 16억7천7백만원으로 철골 유리온실(공정유묘장) 1천5백평과 파이프온실 7천6백평, 예냉시설 50평, 수송차량 1대, 관정2공등의 사업을 시공하게 되었다.
최초 시공예정지로 생각했던 임차농지는 경사가 심해 토목공사비가 엄청나게 소요된다는 결론을 내리고 가른 장소를 찾기위해 백방으로 물색하던중 결국 지금의 사업장 위치에 20년간 임차계약을 맺고 한 장소가 아닌 1.5km 거리에 1단지 2단지로 분리해 시공하기로 확정하였다.
겨우 사업장을 확정짓고 시공업자 선정도 하지못한 그때부터 시련은 시작되었다.
끝까지 사업을 포기하지 않고 참여하겠다고 각섞지 썼던 동료회원들이 자부담과 담보물 제공 문제들이 제기되자 하나 둘씩 이핑계 저핑계를 대며 탈퇴의사를 밝혔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차라리 시작이나 하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뿐이었고 법인 대표를 맡고 있는 나로서는 사업을 포기할 수도 없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는 누구에게 하소연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남아있는 회원은 3명뿐이었다. 최소한 5명은 되어야 법인체가 존립할 수 있는 상황에서 이렇게 되면 사업포기는 물론 영농조합법인을 해체 해야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설수는 없었다.
우리들에게 사업유치를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해주신 모든분들을 보아서도 또한 사업자체를 포기한다면 이 지역 농업의 발전은커녕 후퇴하게 된다는 생각에 2명의 사업참여 희망농가를 새로영입시켰다. 이제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끝까지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사업을 이끌어 가기로 굳게 다짐했다.
처음부터 모진 시련을 겪어야 했던 사업추진은 사업지역이 도시계획 지역으로서 토목설계부터 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수십차례 시청과 설계사무소를 오가며 3개월여만에 허가를 받아 토목공사에 착수했고 시공업자를 선정하여 최첨단 시설을 갖추기위해 동료회원들과 함께 국내 우수 시설들을 들아다니면 견학을 하고 좋은점들만 적용해 농어촌진흥공사와 설계 계약을 체결하였다.
정말 어렵게 어렵게 공사를 착공하게 되었다. 계약을 체결한 시공업자는 온실공사를 차일피일 미루며 95년 가을이 되어서야 하청업자에게 맡겨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갔다. 준공일을 한달여 앞둔 12월말의 공정은 약 40% 정도밖에 진척되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95년 한해를 보내고 96년 새해를 맞았다. 그러나 이게 또 웬 날벼락이란 말인가! 새로운 마음으로 새해를 맞아야 할 1월1일 새해아치에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시공업자가 부도를 내고 자취를 감췄다는 것이었다.
설마하는 마음으로 동료회원들과 함께 경기도 광주 시공업자 회사 사무실로 달려갔지만 이미 채권자들과 자재납품업자들만 몰려와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참으로 앞이 캄캄하게 느껴졌다. 그때는 이미 연말에 3억원의 중도금까지 건네준 터였다.
몇일 뒤 수소문 끝에 들려오는 소식은 해외로 출국했다는 것이었다. 일손이 잡히질 않았고 잠도 이룰수가 없었으며 눈물말 앞을 가렸다. 계속되는 시련속에 하늘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여기서 주저앉을 수 만은 없었다. 암흑속으로 몰아 넣었던 시공업자의 부도사태를 씻어 버리기전에는 몇날이 흘렀다. 동료 회원들과 대책을 숙의한 끝에 우리가 직접 공사를 진행시키기로 하고 농협을 비롯한 관내 금융기관을 쫒아 다니며 부족한 사업비를 마련하여 직접 자재를 구입해 현장에 남아있는 하청업체 인부들과 함께 공사를 계속 진행시켰다.
드디어 파이프온실이 완공되고 공정육묘장인 철골 유리온실의 마지막 단계인 유리가 끼워지고 육묘장 내부의 베드설치가 완료되었다. 예냉시설 시공업자까지 건물만 지어놓고 내부시설을 몇 개월씩이나 방치시키는 바람에 포기각서를 받고 또 다른 업자를 선정해 완공하게 되기까지 정말 우여곡절 끝에 공사를 매듭 지을 수 있었다.
96년 6월22일 드디어 준공식을 갖게 되었다. 당초 공사비 16억7천7백만원 보다 7억2천1백만원의 추가 자부담이 소요된 23억9천8백만원에 공사가 최종 마무리 된 것이다.
보조금 8억3백30만원, 융자금 5억3백만원, 자부담 9억5천7백만원의 사업비가 소요되다보니 5명의 자부담금으로는 엄청난 부담이 되었다.
그러나 파란만장 끝에 준공식을 갖던날 우리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자부감금 과다로 부채는 많이 지었지만 결국 해냈다는 자부심으로 이제 이보다 더한 시련도 극복해 낼 수 있다는 각오로 시설채소와 공정육묘 생산서업은 시작되었다.
공정육묘장은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여름철 고온기를 대비한 저온육묘 시스템을 완비하였고 첨단 유리온실에 권취식 비닐측창은 어울리지 않는 시설이지만 환기문제를 해결하기엔 최적시설이며 100%국산자재로 시공되었다는 것도 자랑스러운 일이다.
연료비 절감을 위해 착안한 평면 3중 커텐시설과 특유의 자주식 관수시설 육묘가 온실을 채워나가는대로 가온 할수 있도록 3개동으로 나누어 시공한 것등 모두가 컴퓨터로 자동제어 되는 최첨단 육묘생산 시스템으로 갖추어졌다.
파이프 온실에서는 그동안 최고 품질이 과채류(오이, 방울토마토) 양액재배 생산과정에서 익혀온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전체면적을 우리들만의 노하우로 개발한 초 절약형 양액재배 시설을 갖추었다. 환경친화형 농업에 동참하는 차원에서 폐양액 재활용시설도 갖추고 절약형 양액공급기 시설과 절약형 지중난방 시설까지 모두 자체 개발한 기술로 시설을 했다. 모든 시설을 마치고 첫 작목으로 오이와 방울토마토를 억제작형으로 정식하였다. 결과는 성공작이었다.
또한 공정육묘장에서는 각종 채소, 화훼육묘를 생산하고 있는데 타육묘장과 차별화를 두기위해 원예 연구소에서 기술을 익힌 [단근편엽합접]으로 접목묘를 생산하여 공급을 받은 농가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처음에는 접목묘 일부가 활착과정에서 잘못되어 납품일자를 넘기는 바람에 농가로부터 질책을 받기도 했으나 20평의 접목묘 전용 활착실을 자체기술로 육묘장내에 설치해 놓고 온도, 습도, 차광등을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게 함으로써 이제는 완벽한 육묘생산 기술을 터득하여 각종 우량육묘를 년중 대량생산공급 체계를 갖추어 공정육묘 산업의 새로운 장을 열어가고 있다.
지난해 4월 중순쯤이었다. 여름철에나 볼수 있었던 장대비가 갑자기 쏟아 부었다. 2단지 4천2백평의 파이프 온실이 물에 잠겼다. 온실 주변의 논 경지정리 작업중 물빠짐 도랑을 막아놓아 밤새 쏟아진 빗물로 인해 물에 잠긴 온실에는 방울토마토가 한창 수확중이었으므로 또 한번의 시련을 맞게 된 것이다.
수확을 포기해야할 위기에 처해 있었으나 며칠이 자나도 생육에는 아무런 장해가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양액재배를 했기 때문에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토양재배였더라면 불가능 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볼 때 정말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2단지 온실이 들어선곳은 간척지 논에 시공한 것으로 예전에는 소금을 생산하던 염전자리였다는 것을 생각할 때 첨단 농업으로 승부를 걸어 나가겠다는 우리들의 각오는 그 어떤 장해물도 거뜬히 뚫고 나갈 수 있다는 교훈으로 남겨주게 되었다.
또한 안전성이 포함된 최고 품질의 농산물만을 생산해야만 살아 남을 수 있다는 각오는 품질인증을 따게 하는데 큰 힘이 되었고 생산된 오이와 방울토마토는 선과장에서 엄격한 선별작업을 거쳐 가락동 농산물 도매시장에서 최고값에 경매되고 일부는 아파트 단지에 직거래되고 있으며 금년부터는 수출업체의 대일수출 제의도 들어와 상담중에 있다.
지난해 11월초에는 절약형 방울토마토 양액재배기술에 대하여 KBS 제1TV의 [농업도 기업이다] 프로그램에 방영되면서 전국 각지에서 절약형 양액재배기술을 배우려는 농업인들의 전화문의가 쇄도하고 있으며 직접 방문하여 현장을 견학하는 농업인들이 줄을 잇고 있다.
더욱이 인근 초등학교 및 농업학교, 유치원에 이르기까지 또는 주말에 인근 아파트 주민들의 가족단위 방문객이 늘어나면서 자연학습장으로서의 역할도 해나가고 있다.
이렇게 저비용 고기술농업, 고품질 농산물 생산분야에서는 그 누구 못지않은 자신감을 갖고 있다. 그러나 지난 97년 충남도청의 지원으로 영농조합법인 종합 컨설팅을 받고 그 결과를 분석해보게 됨으로써 비로소 법인체의 경영관리 부문에서는 너무나도 부족한 부분이 많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뚜렷한 방향설정없이 경영, 생산, 마케팅, 재무, 인사관리등을 해옴으로 여러 가지 부작용이 발생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나는 종합진단 결과를 바탕으로 한꺼번에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결해 나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므로 한가지 한가지 가능한 일부터 개선해 나가기로 임원들과 함께 결의하였다.
첫째로, 경영관리 부문에서는 경영진단을 계기로 경영목표와 방침을 새롭게 설정하고 경영, 생산, 마케팅, 재무, 인사 조직관리 계획을 확고하게 수립하였다.
[정성과 혼신을 다하여, 확신과 용기를 다하여, 책임과 최선을 다하여, 슬기와 지혜를 다하여]라는 사훈아래 [경영관리 확신, 생산관리 혁신, 마케팅 관리 혁신]이라는 3대 경영목표를 두고 [최고를 지향한 고기술, 고품질 생산, 작은것도 소중히 하는 원가절감경영, 밝은 미래를 향한 정보화체계확립, 신바람나는 알찬 신기술개발 지속, 선택에 확신을 주는 마케팅전략 수립]이라는 경영방침을 세워서 새롭게 다시 출발한다는 각오로 경영개선을 해나가기로 하였다.
또한 나는 경영책임자로서 법인의 미래상에 대한 뚜렷한 비젼을 가지고 각종 계획을 수립하고 실천해 나가는데 최선을 다해 나가기로 결심하였다.
두 번째로 생산관리 부문에서는 97년말 갑자기 몰아닥친 IMF한파로 나라경제가 위기에 처하면서 어려움이 닥쳐오면 제일 먼저 먹거리부터 줄여 나가는 우리나라 국민들의 습성 때문에 천장부지로 치솟는 유류값과 농자재등의 값에 비해 농산물은 오히려 소비부진으로 바닥세를 면치못하는 기현상으로 그야말로 우리농업을 뿌리채 흔들고 있는 상황속에서 생산계획을 세운다는 것은 많은 갈등을 가져왔다.
그래도 계획성없는 농업은 생존하지 못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사업장별 생산계획을 철두철미하게 세웠다. 그동안 통합기록 해나가던 경영일지도 관련분야별로 기록하게 함으로써 전문성이 있는 생산관리에 만전을 기해 나가도록 하였다.
세 번째로 마케팅 관리 측면에서는 우리 영농조합으로서는 공정육묘장 운영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사업이기 때문에 고객관리에 역점을 두고 농업관련 신문과 인터넷등을 통해 국내 시설 재배 농가들의 정보를 제공받으며 고객유치에 최선을다해 나가고 있다.
이곳 서산지역은 지역여건상 충남 서북부 해안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해풍으로 인한 육묘생산에는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지만 판매쪽에서는 불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음을 인지하고 각종 전시회 및 홍보행사에 빠짐없이 참여하며 자체제작한 홍보물 발송등을 통하여 지속적인 홍보활동을 펼쳐온 결과 위쪽으로는 경기, 강원도, 아래쪽으로는 경남, 전남, 제주까지 폭넓게 거래선을 확보하여 우량육묘 보급에 노력하고 있다.
또한 파이프 온실의 주생산품목인 방울토마토는 주출하처인 가락동 농산물 도매시장을 벗어나 아파트 단지의 직거래와 수출농업으로 전환하기위한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네 번째로 재물관리 부문에서는 경영진단을 받으면서 회계방식을 전산화시켰다. 그동안 장부기장으로 복식부기 회계관리를 해옴으로 뭐가 뭔지조차, 그때 그때 입.출금 내역을 잘 모르고 운영해왔지만 이제 필요한 내용을 언제나 컴퓨터에서 한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획기적인 변화라고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제는 잔액시산표, 대차대조표, 손익계산서까지도 필요한 때마다 즉시 즉시 빼어 볼 수 있게 되었고 회계사에 맡기지 않아도 정산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매일매일 일일계산서를 작성하여 임원들 모두 확인후 결재를 하게하여 회계상황을 투명하게 운영함으로서 화기애애한 법인운영에 큰 도움이되고 있다.
다섯째로 인사조직관리 측면은 경영진단 결과의 개선권고 사항에 따라 과감한 조직개편을 단행하였다. 법인대표인 내가 직접관리 운영해왔던 2단지 관리를 관리직원을 채용하여 맡기고 나는 법인의 총체적 관리와 영업활동에 주력하고 공정육묘장과 1단지, 2단지 사업장별 작업반장 제도를 도입하여 체계적인 운영을 시도해 나가고 있다.
그리고 주1회 직원회의와 고용인력조회 제도를 도입하여 경영방침을 주지시키고 작업지시를 일관성있게하며 작업현장에서의 대화시간을 자주 갖음으로서 운영상 문제점도 찾고 해결해 나감으로써 고용인력과의 화합에도 많은 신경을 써 나가고 있다.
사업개시 3년째를 맞던 98년 지난 한해는 정말로 어려웠던 한해였다. IMF한파는 우리에게도 어김없이 찾아든 것이다. 각종 농자재값 인상과 유류값 폭등 및 시공업자 부도도 추가 자부담금으로 충당했던 은행 대출금의 고금리로 인한 이자부담 가중등으로 흑자결산을 기대해 왔던 꿈이 깨어진 한해로서 그래도 그 위기를 슬기롭게 대처해 나가 오늘도 농업생산 활동에 전념해 나가고 있다는 것은 불행중 다행스런일로 여기며 또다시 한해를 맞아 저 높은곳 푸른꿈을 향해 힘찬 발걸음을 재촉해 나가고 있다.
아직도 우리 모두가 기대하고 있는 목표까지는 험준한 가시발길 헤쳐나가는 것 만큼이나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동료들과 함께 힘을 모아 신기술 농업개발로 승부를 걸겠다는 각오로 그동안 자체개발하여 활용해오고 있는 절약형 양액재배 배지경 기술과 무배지 양액재배기술, 초절약형 간이 양액재배 기술, 절약형 지중 냉.난방시설, 절약형 30만원대의 양액 공급기 시설, 퇴수양액 재활용기술, 방울토마토의 고당도 저농약 생산기술등을 통하여 저비용 고품질 생산에 최대한 활용해 나간다면 지금의 위기를 슬기롭게 헤쳐나갈 수 있는 길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 믿고 오늘도 최선의 노력을 다해 나가고 있다.
또한 생산비 절감에 초점을 맞춰나가야만 이 난국을 헤쳐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나는 생산비를 절감시켜 나갈 수 있는 길은 시설재배 농가들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겨울철 난방비비를 줄여나가는데서 찾아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개인농장의 하우스 9백평과 법인온실 공정육묘장을 포함한 9천1백평등 1만여평의 대규모 온실을 운영하다보니 모두가 기름을 이용한 가온시설로서 유류값이 차지하는 비중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다. 한방울의 석유도 생산하지 못하는 나라에서 경제개발의 붐을 타고 석유로만 사용할 수 있는 난방기들만 만들어 보급해온 탓으로 결국 어려운 고유가 시대를 맞아 최종 피해자는 농민들의 몫으로 남게 된 것이다.
이제와서 이 위기를 누구탓이냐고 따지기 전에 에너지 절감운영을 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살아남기 힘들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연료비를 절감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시설비 부담을 불러온다는 생각으로 나는 먼저 나 스스로 최소 경비로 해결할 수 있는 일부터 하나씩 실천해 나가기로 하였다.
제일 먼저 개인농장 하우스에 누구나 손쉽게 설치할 수 있는 축열 물주머니를 설치하는것부터 시작하였다. 그리고 가장 열손실이 많은 측면 커텐 안쪽에 또 한겹의 부직포벽을 설치했다.
또한 온실중앙 밑으로 3중대형 턴널을 설치하고 동별로 위, 아래로 올리고 낵려줄 수 있도록 아침, 저녁으로 조금은 번거롭지만 수동개폐기를 부착시켰다. 열손실이 많은 밤에는 내려서 밀폐시켜주고 낮에는 환기를 위해 열어줘야 하기 때문에 개폐장치가 필요했다.
그리고 양액재배 베드속에 깔아놓은 지중난방 XL파이프를 베드위로 꺼내어 지표난방 서설로 전환시켰다. 비표난방으로 바꾼 뒤 참외를 정식하고 턴널을 해준후 온풍난방기를 가동하지 않고 지표난방 볼이러만 가동하여 실험해본 결과 1일 평균 경유소비량은 9백평에 48ℓ로 온풍난방기 가동시 1백10ℓ에 비해 45% 이상의 연료비가 저감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영농조합 공동농장에는 농업인 개발과제로 신청하여 선정된 정부보조사업으로 실시하고 있는 심야전력을 이용한 온실공간 및 지중보조 난방시설을 설치해 실증시험을 성공리에 마치고 가동중에 있다.
밤 10시부터 아침 8시까지 사용할 수 있는 심야전력으로 심야온수기를 이용해 물을 데워서 온실 기둥에 연결한 파이프 라인을 통해 더운물을 순환시킴으로서 발생되는 열량만큼 기존 설치되어 있는 온풍난방기 및 지중보일러 가동횟수가 그만큼 줄어들므로 연료를 절약하는 기술이다.
지난해 봄 2월3일부터 가동하여 3월 30일까지 체크한 연료사용수치는 시험구 6백평에서 3,243ℓ, 대구비 6백평 온실에서는 4,051ℓ을 사용하여 808ℓ을 절약하게 되었다.
또 하나의 연료절감 시설은 공정유묘장의 시설이다. 육묘장에서는 밤낮없이 온도를 높게 유지시켜 줘야하므로 유류값이 다른 절감에 비해 몇배 더 소요되 가장 신경을 써야할 부분이다.
비수기때에는 부분난방을 하기위하여 1천6백평을 3개동으로 분리하여 시공하였고 육묘베드(벤치)밑에 보조난방기로 설치한 온풍난방기 바람을 활용하기 위해 비닐닥트를 동별 베드 수량만큼 15개라인을 설치하고 온풍기에서 나오는 풍량을 조절하기 위해 볼펜을 이용하여 작은 바람구멍을 뚫어줌으로써 고르게 더운바람을 분포시켜 주어 근권난방 효과를 가져와 작물에게도 좋은 생육효과를 줌고 동시에 기존 보일러 파이프라인의 가동횟수가 줄어들어 연료절감을 시켜나가고 있다.
그리고 베드 옆에는 닥트에서 나오는 열을 조금이라도 빼앗기지 않으려도 비닐로 치마를 설치하였다. 얼마만큼의 유류가 절감되는지는 아직 측정을 못해 확인할 수는 없지만 이 시설도 많은 유류가 절감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나는 이렇게 농업을 경영해 나가면서 주변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을 주제로 다양한 절약형 신기술농업을 개발하여 활용해 나가면서 모든 농업인들에게 보급해 나가는데도 노력해 나가고 있다.
나는 앞으로도 신농업 기술개발에 최선의 노력을 다해나갈 것이며 특히 그린라운드를 대비한 환경 친화적 신농업 기술개발과 보급활동에도 남은 젊음을 다바쳐 나갈 것을 굳게 다짐해 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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